시조(始祖)

문경공 이공정 (文景公 李公靖 : 1137년 ~ 1212년)

우봉이씨 시조 문경공[文景公 : 공정(公靖)]은 서기 1137년[고려조 인종15년, 정사(丁巳)]에 태어나서 1212년[강종(康宗)]에 향년 76세를 일기로 영면하셨다.

 

  우리 우봉이씨(牛峯李氏) 원조(元祖)는 통일 신라 이전의 우장군(右將軍) 두창(頭昌) 어른으로, 지략(智略)이 남보다 뛰어나서 옥저(沃沮)로 하여금 잘 달리는 말(양마) 200필을 헌납하게 한 공으로 신라공신이 되었다고 명위보(明衛譜)에는  전하여 지고 있으나 사기(史記)에는 기록이 없고 또한 그 뒤의 후손에 대한 기록도 없어져서, 서기 1137년 고려 인종(仁宗) 때 우봉현(牛峯縣) 도이촌(桃李村)에서 태어나 고려(高麗) 명종(明宗) 때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벽상삼한삼중공신(壁上三韓三重功臣)에, 지금의 국무총리격(格)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잠성부원군(岑城府院君)에 봉해지신 휘(諱) 공정(公靖)을 시조(始祖)로 모시고 그때부터 본관(本貫)을 우봉(牛峯)으로 하였다. 시조공은 희종(熙宗)때에 병부상서로 좌천되셨다가 돌아가셨는데, 뒤에 삼주백(三州伯)의 백작(伯爵)을 증직(贈職)받으셨고, 문경(文景)의 시호(詩號)를 받은 분으로 고려사 열전에서 의렬[義烈 : 휘(諱) 자성(子晟)]공의 父로 처음 기록을 찾는다.

※ 주해(註解 : 본문의 뜻을 풀이함. 또는 그 글)

* 우장군 (右將軍) : 신라시대 이전의 군의 계급

* 명위보(明衛譜) : 우봉이씨 옛 족보

*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 고려 때 종2품의 문관직(현재의 차관보와 대등함)

* 벽상삼한삼중(壁上三韓三重) : 고려 때 정1품의 무관직(현재의 국무총리와 대등함)

※ 주해(註解)

* 문하시중(門下侍中) : 고려 때 문하성의 최고관리 종1품의 문관(현재의 부총리)

* 부원군(府院君) : 고려 때 정1품 공신에 내린 작호

* 병부상서(兵部尙書) : 고려시대 병부(兵部)의 장관. 지금의 국방부 장관과 같음.

*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 고려시대 국가 행정을 총괄하던 관청으로 왕의

                          조서를 받들어 심사하고 시행하던 기관

* 급사중(給事中): 고려시대 중서문하성에 소속된 종4품의 벼슬

                     (현, 4급 서기관과 3급 부이사관 사이)

*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 고려 때 문하부의 정2품의 문관직(현재의 장차관급)

* 동경 : 지금의 경주를 말함

* 시호 : 생전의 공적을 찬양하여 사후에 임금이 내려주는 이름

* 식읍 : 옛날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던 땅

* 백작 : 고려, 이조 때 5등작 중의 벼슬(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 상장군(上將軍) : 고려와 조선초기의 정3품의 무관, 현재의 소장급

* 병마사(兵馬使) : 고려 때 군권을 지휘하던 정3품 벼슬, 현재의 소장급

* 교서(敎書) : 임금이 내리는 명령서, 훈유서

* 제수(除授) : 임금이 벼슬을 주는 것.

* 참지정사(參知政事)  : 고려 때 문하성(중앙 의정기관)의 종2품 관직(현재의 차관보와 대등)

* 판호부사(判戶部事) : 고려 때 국가의 재정과 호구를 관장하던 기관.(지금의

             재무부와 같음. 종1품 벼슬로 현재의 부총리격)

* 태보(太保) : 고려 때 왕의 최고 고문직으로 국가 최고의 명예직이며 정1품 벼슬

시조공은 수지의(首智衣), 잠성(岑城), 우봉(牛峯)등 세 골을 식읍[食邑 : 국가에서 공신에게 내리어, 조세를 개인이 받아쓰게 하던 고을. 식봉(食封)]으로 하사(下賜)받아 그곳에 살면서 본관을 우봉(牛峯)으로 정하였다. 배위(配位)는 이천(利川) 서씨(徐氏)로 위위의 차관인 우찬선대부 서추의 따님이시며, 묘소는 시조(始祖)와 합폄(合窆)으로 모셨다. 아드님이 두 분이니 맏이의 휘(諱)는 자의(子儀)로 벼슬은 문하평장사

門下平章事)요, 둘째 아드님의 휘(諱)는 자성(子晟)으로 벼슬은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이시고, 시호(諡號)는 의열(義烈)이시다.

 

시조(公靖) 공의 활약상은 고려사에서 신라부흥을 위한 난을 일으켰을 때 평정을 위한 활동의 기록으로 발견된다. 즉 명종 13년 충주목사 정원해(鄭元懈)의 수탈행위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으로 민심이 험악해진 틈을 타서 김사미(金沙彌 ⁃ 一云 金三)와 효심(孝心)이 신라부흥을 위한 난을 일으키자, 전존걸(全存傑)을 대장군으로 이지순(李至純 ⁃ 이의민의 아들) ⁃ 이공정(李公靖) 장군 등으로 하여금 반란을 평정하도록 했다. 그러나 고향이 경주인 이지순은 적과 내통하여 토벌에 실패를 거듭하자, 전존걸 장군은 책임을 느껴 음독자살하는 일이 벌어졌다.[韓國史 中世篇(969.6.5 震檀學會) 을유문화사 간 P.492]

  그 후 공정 장군은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올랐다.

고종 18년(1231년) 몽고 원수 살리타이[철례탑(撤禮塔)]가 군사를 이끌고 침입을 시작할 무렵, 시조공의 차남 자성(自晟)이 장수로 출전하여 공을 크게 세워 집안은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특히 왕이 강화도로 천도한 틈을 타서 이통(李通)이 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의렬 공은 상장군으로 후군진주가 되어 이를 평정하고 이어 충주에서 일어난 노예들의 괴수인 우본(牛本)을 척살하고 난을 막았다. 1233년 4월에는 중군병마사가 되어 용문창에서 일어난 난을 토평하고 6월에 최산(崔山), 이유(李儒) 등이 일으킨 반란도 평정한 업적은 고려사 열전에서 찾는다.

 고려는 30여 년간 몽고군에게 시달림을 받다가 원종이 몽고군과 강화한 후인 1264년 원종 25년에 개성으로 환도하였다. 이때부터 80년간 고려는 원나라 황실과 결혼하게 되면서 나라의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시조 공은  고려 예종 때 대청감 문원(文元) 공과 기국 숙부인 밀양 박씨 사이에서 인종 14년(1136년)에 태어났다. 슬하에는 이천 서씨 사이에 집현 자평(子平), 평장사 자의(子儀), 평장사 자성(子晟) 세 아들을 두었다.

 시조 공은 고을의 군수(현위)를 거쳐 백주 ⁃ 영주 ⁃ 홍국 ⁃ 평주 ⁃ 나군의 현감과 평양에 속했던 낙원 현에 있어서 평산 우봉 토산 세 곳의 현감을 지냈다.  

 문하시중 최고 벼슬에 오르기까지 13곳의 벼슬을 하고 공이 강종 임신년(1212년)에 돌아가시니 관직 60년 동안 청렴하고 근신하고 관후하고 화평하여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다스림에 힘썼다. 향년 77세, 의렬 공의공적으로 삼주백 잠성부원군에 추봉(追封)되었다.

 시조 공은 일찍이 말하기를 훈공의 노고가 나라와 민생에 미칠만한 보답이 없었는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허물없이 견책을 면했으니 다행스럽기만 하다. 장사 날에 절대로 당대에 어진 분에게 비명이나 지문을 지어달라고 간구하지 말라. 기록할만한 사실이 없는데 헛된 말로 미화하면 못내는 부덕함을 보태는데 면할 길이 없을 것이니 다만 이 글을 돌에 새겨서 광중벽을 향하여 잘 놓아 두어라. 만약 혹시 조금이라도 유명을 어기면 이는 안다고 하는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라고 하는 문헌을 남기고 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상장군 최세보[崔世輔 1133 ~ 1193 ⁃ 고려 명종 23년 무신(武臣), 평장사, 상장군, 判吏部事, 수태사(守太師), 수국사(修國史), 최충헌 정권 후 실각, 武臣으로 儒臣의 권한까지 겸비할 수 있도록 제도를 실현하였다.] 공이 지은 시조공에 대한 제문의 문헌이 남아 있다. 아, 슬프도다. 예전에 내가 그대와 더불어 우연히 초주 남쪽에서 만나 말하면 서로 의사가 통하고 의기가 서로 맞아 사귄지가 어언 60년이 되었다. 그 정은 골육과도 같았는데 갑자기 부고를 받으니 그 애통함이 어떻겠는가. 아 슬프도다. 대응 좀 해보소서. 누가 당신을 꼬여서 여기까지 이르게 했단 말이오. 그 높은 재주와 거룩한 도량은 모든 사람보다 뛰어났고 용모도 훤칠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고 알듯하면서도 알 수가 없구려. 하늘은 어찌하여 이렇게 많은 재덕을 내려 주시고, 나이는 이렇듯 인색하게 하셨나이까. 사람이 뉘라서 죽지 아니 오리만은 당신에 대해서는 너무나 한스럽구려. 어찌 오랜 사귐의 정만을 슬퍼할 뿐이겠소이까?

  고향언덕 선영에 돌아가 편히 쉬소서. 나는 늙고 병들어서 길이 너무 멀기 때문에 산지에 따라가서 싫건 울어 속에 있는 슬픈 정을 털어놓지 못하고, 우선 이 변변치 못한 제수로서 영혼 앞에 올리오니 이 성의를 굽어 살펴서 흠향 하시소서.(원문 생략)

 

또한 이규보의 시문집인「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권5에서 시조를 찾을 수 있는데 그 원시를 찾아 잘못된 글자를 바로잡아 번역과 주해를 붙여 읽어 보기로 한다.

 

 

 이 <제급사이공정>의 율시(律詩)는 우리 시조공의 기골의 장대함과, 그 아드님 의열공까지 크게 현달(顯達)해서, 국가의 동량(棟梁)으로 부자(父子)가 나란히 당나라 재상 영호초 부자와 같고, 문경공의 기세는 태산을 잡아당길 정도이고, 장군의 병볼 다루는 위세는 번개처럼 득달해서 대적한 상대가 없는데다가, 일단 문하성 간원에서는 임금의 잘못을 극간하는 의기가 당나라 장현소와 같고, 병졸을 거느려 통솔함은 당나라 명장 이정과 같다고, 아예 '이금오'라고 기리었다. 끝으로 문경공은 문하성의 봉황지에서 임금의 은총을 두루 입어, 그 여력은 학철(涸轍)의 붕어처럼 도탄에 빠진 민생을 모조리 구원하고 남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상을 미루어 이 작품은 우리 우봉이문으로서는 시조 문경공에 관한 객관적인 유일한 자료인 만큼, 마땅히 널리 익혀 자손들에게 두루 가르쳐야 할 귀중한 문헌이라 하겠다.

※ 주해(註解)  

* 영호(令狐) : 당나라 재상인 영호초(令狐楚) 영호도(令狐淘) 父子가 재상

   (宰相)이었던 것과 같이 우리 문경공과 아드님 의렬공도 함께 재상이었다는       것을 말함.

* 장급사(張給事) : 당나라 때 급사중인 장현소(張玄素)가 태종이 낙양

    (洛陽)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대궐 짓는 것을 간했다.(잘못된 일이라고 하다)

* 이금오(李金吾) : 당나라 임금 친위대장 이정(李靖) 장군 이름이 우리 시조

     문경공의 휘(諱) 이공정(李公靖)과 비슷해서 비한 것.

* 학철(涸轍) : 비가 온 뒤에 수레바퀴 자국에서 팔딱거리는 붕어의 신세

     처럼 위급한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