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本貫) 연혁

우리 집안의 관향(貫鄕)은 우봉(牛峯)이다.

본관(本貫)은 관향(貫鄕) 또는 관적(貫籍)으로 그 집안의 선조(先祖)인 시조(始祖)가 출생하여 성장한 곳을 말하며, 우봉현(牛峯縣)은 우봉이씨 시조(始祖) 문경공[文景公 : 휘(諱)ㆍ공정(公靖), 문하시중(門下侍中)]께서 식읍(食邑)으로 삼아 관향이 시작된 곳이다.

1530년(중종 35년)에 발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우봉(牛峯) 란을 보면 다음이 기재되어 있다.

※주석(註釋 : 낱말이나 문장의 뜻을 쉽게 풀이함. 또는 그 글)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 東國輿地勝覽)은 1530년(중종 35년) 이행(李荇), 진전문(進箋文), 노사진(盧思眞), 서거정(徐居正 : 서문) 등이 참여하여 국내 각도의  연혁(沿革)·풍속(風俗)·묘사(廟社)·능침(陵寢)·궁궐·관부(官府)·학교·토산(土産)·효자열녀의 행장·성곽·산천·누정(樓亭)·신사(神祠)·역원(驛院)·교량·명현(名賢)의 사적, 시인의 제영(題詠) 등이 상세히 수록된 책자로 55권 25책으로 됨.

관향 소재지인 우봉현(牛峯縣)은 지금의 황해도 금천군(金川郡) 금천면으로 고구려 때부터 우잠군(牛岑郡) 굴압현(屈狎縣) 등의 명칭으로 불렀으며, 우령 수지의(牛嶺 首知衣)라고도 하였다. 신라에서는 송악군(松岳郡) 강음현(江陰縣)에 속하면서 757년[통일 신라 경덕왕(景德王) 16년]에 우봉(牛峯)으로 개칭되고, 1015년(고려 현종 6년)에는 평주현(平州縣 : 平山)에 예속되었고, 1062년[고려 문종(文宗) 16년]에 경기도 개성부(開城府)에 예속되었다. 1395년(조선 태조 4년)에 우봉현(牛峯縣)으로 승격되었으며, 1413년(조선 태종 13년)에는 강음현(江陰縣)과 함께 경기도에서 황해도로 편입되었다. 1469년(예종 1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1652년(조선 효종 3년)에 우봉현(牛峯縣)과 이웃 강음현(江陰縣)을 합쳐 금천군(金川郡)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95년(고종 32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강음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우봉(牛峯)·토산(兎山)·강음을 금천군으로 통합하였다. 1954년 황해도가 남도·북도로 분할됨에 따라 황해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 주석(註釋)

  강음현(江陰縣)은 원래 고구려의 굴압현(屈押縣)〔강서(江西)라고도 한다〕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송악군(松岳郡)의 관할 하에 현(領縣)으로 만들었다.

우봉현의 위치는  동쪽으로 토산 경계까지 33리, 남쪽으로는 경기도 장단까지 84리, 서쪽으로는 평산 경계까지 29리, 북쪽으로는 신계 경계까지 31리로 서울과의 거리는 280리이다.

  산천은 고을을 중심으로 학봉산이 북쪽 30리에 있고, 수룡산은 동쪽에 장굴산이 서쪽 15리에 있다. 성거산 북쪽에 인달암(岩)이 있으며, 청석현(峴)이 30리에 있다. 백계현은 동쪽 30리에, 성거산(구룡산), 평사산이 60리에 있다. 이 성거산은 다섯 봉우리가 있어 오암리라고 부른다.

 이 고장에서 나는 토산품은 청려석이 경아점(岾)에서 나며, 석이(石耳), 벌꿀, 인삼, 잣, 무쇠가 나온다. 고을 남쪽에 부흥사가 있으며, 성거산에 영감사, 원달사, 운암사, 운필사, 인달사, 영취봉에 현화사, 선거산에 문수사가 있다. 고을 서쪽에는 사직단과 향교가 있다.

 

 우봉이씨 시조인 문경公(1137 ~ 1212)은 향년 76세를 일기로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삼주백 문경(金紫光祿大夫 門下侍中 三州伯 文景)의 시호를 받은 분으로 고려사 열전에서 이자성[李子晟ㆍ평장사(平章事)]의 아버지가 병부상서(兵部尙書) 공정(公靖)이라고 밝혀져 시조로 삼아 정확한 가계(家系)의 근거로 하였다.

 

  우봉(牛峯)을 본관으로 삼은 성씨는 우봉 이씨(李氏)를 비롯한, 최(崔), 황(黃), 태(太), 김(金), 박(朴) 등 성씨(姓氏)가 있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이 지역의 역사상 인물로는 이자성(李子晟 : 의렬공(義烈公), 2世 우봉인)과 이길배(李吉培 : 8世 우봉인)가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자성은 천성이 강렬하고 용력이 있으며 활을 잘 쏘아서 여러 번 전공을 세웠으며, 동경(경주)을 평정한 이후로 장사들의 시기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병을 핑계로 문을 닫고 출입을 삼가니 사람들이 기미를 안다고 했다. 벼슬이 문하평장사에 이르렀으며, 의렬(義烈)의 시호를 받았다. 한편 이길배는 일찍이 과거에 합격하여 황해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문경공의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소남면 유덕리 마답동 간좌향에 있다. 당초에는 우봉현(牛峯縣) 도이촌(桃李村)에 있다고 하였으나, 그동안 실전(失傳)되어 찾을 길이 없었는데 1925년 4월 도굴하던 사람이 폐총을 파헤치다가 지석을 발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장단군에 살고 있던 필녕(弼寧) 일가가 가서 보니 시조공의 지석이었다. 필녕 일가는 즉시 이 소식을 서울에 있는 종약소(宗約所·당시 회장 : 이완용)에 알렸다.

 당시 회장이던 일당공(완용)은 즉시 종회 회의를 열고 종중의 여러 유사와 함께 현장으로 가서 면밀히 조사하였다. 발굴된 지석의 글 내용이 시조공을 입증할 만한 행장내용으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여러 문헌을 종합해보니 시조공의 무덤이 틀림없었다. 위치도 이곳은 조선조 때 황해도 금천군 우봉현 도리촌 이었음을 확이하였다. 700여 년간 실전되었던 우봉이씨 시조의 묘소를 찾게 된 순간이었다.

  일당은 즉시 묘역을 구분하여 묘막을 짓고 석물과 위토를 하는 등 치산을 하였는데 완공을 보지 못하고 일당공이 갑자기 돌아가는 불행을 맞았다. 당시 이왕직장으로 계시든 일당의 아들인 항구 공이 종친회 회장의 대를 잇게 되자, 우선 빗돌을 세워서 동북방을 뒤로하여 서남방 언덕 간좌(艮坐)에 모시고, 비문은 종친회장 겸 24대손 이왕직 시사장 항구公이 짓고 글씨는 25대손 전 가선대부 비서 보좌관 병묵公이 글씨를 쓰고 무진년에 세웠다. 세운 墓表 내용과 후손이 노래한 詩가 있다.

※주석(註釋)

 묘표(墓表) : 무덤 앞에 세우는 푯돌《품계· 관직·성명 등을 새김》. 표석(表石).     묘표(墓標) : 무덤 앞에 세우는 표. 묘비 따위 같은 것.

① 묘표(墓表)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잠성부원군 증 삼주백 시문경공 휘공정지묘 배 이천서씨 부

[金紫光祿大夫 門下侍中 岑城府院君 贈 三州伯 諡文景公 諱公靖之墓 配 利川徐氏 祔]

② 시(詩)

                       마답동 가는 길

                                                                                 지촌

                   개성에서 화장산 고개를 넘어

                   와룡대까지 40리

                   큰 개울을 지나 마대비 고개까지 7마장

                   다시 고개를 넘으면 별봉 덕배기 터 건너편에

                   문경 공 묘소가 보인다

 

                   묘소 앞 비탈진 곳엔

                   많은 밤나무가 경계를 이루고

                   그 아래쪽 돌담을 이룬 우물은 향나무에 덥혀 있으며   

                   추운 겨울에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마답동 마을의 빨래터가 있다.

 

                   주변에는 수 그루의 대추나무가

                   마을의 정취를 더 돋구어준다.

                   150평 넓은 묘소에 서면

                   오른쪽에 다섯 자 높이의 갗을 쓴 오석의 비석과

                   양쪽으로 망주석이 서 있다.

 

                   金紫光祿大夫 門下侍中 岑城府院君

                 贈 三州伯 諡文景公 諱公靖之墓

                 配 利川徐氏 祔

1925년 봄, 옛무덤을 찾아 새롭게 단장했다는 비문 그대로 흐느껴 감격하고 기뻐하며 경하한다.

※ 주해(註解)

  현지에서 8살 때부터 22살까지 살았다는 13년간 선조 묘소를 지켜온

  팔영(八寧 : 83세, 아산시 둔포면 관대리) 일가의 증언에 의해 지음

금천(金川)은 금교(金郊)와 오도천(吾道川)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이름으로 인삼, 석이(石耳), 벌꿀, 잣, 철 등이 많이 나는 고장으로 이름이 나 있다. 임진강 상류인 오도천변(吾道川邊) 벼랑의 절경으로 유명한 쌍봉동(雙鳳洞)은 고려왕실에서 자주 찾든 유원지이기도 했다.

우봉(牛峯) 즉, 금천군은 황해도 동남단에 위치하고, 북쪽으로는 신계군, 서쪽으로는 평산군, 동쪽으로는 강원도 이천군과 철원군, 남쪽으로는 경기도 연천군, 장단군, 개풍군 등과 경계하고 있다. 그러니까 현재는 휴전선 이북 지역이다. 경의선(京義線)의 역명으로는 금교역(金郊驛)으로 서울 쪽에서는 토성역과 신막역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역이다.

 약 850여 년 전 황해도 우봉현에서 태동(胎動)된 우봉이문의 큰물줄기가 9개의 작은 물길로 나뉘어서 전국을 흐르고 있다. 그 중에서 참판공파의 후손 일족 중 문경종중 또한 크게 번성하여 그 세(勢)를 넓혀가고 있다.